미국땅이 하룻밤 사이에 2배로 늘어난 이유는?


 

 

 

 

 

 

 

 

 

 

 

오늘 다룰 내용은,

 

1800년 ~ 1850년까지 미국 땅에서 벌어진 사건들입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미국은 진정으로 강대국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데요.

 

따라서 우리는 특히 이 시기의 미국 역사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키피플들에게 앞으로 진행 될 미국 시리즈가,

'인간'에 대한 깊은 생각과 통찰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1800년대 북미 대륙으로 떠나볼까요?

Let's Go!

 

  

 

 

지난 편에서는, 독립 후 무려 11년이나 대통령이 없던 미국이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출한 이야기까지 다뤄봤습니다.

 

  

 

 

위 그림은, 1783년 당시 북미대륙의 영토 판세인데요. 보시다시피, 당시 초기 미국의 영토는 북미대륙 동쪽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북미대륙 중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루이지애나는 프랑스 식민지였고, 플로리다와 텍사스 영토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죠.

 

  

 

 

즉, 미국은 독립을 하긴 했지만 광활한 북미 대륙의 1/3 정도만 차지하고 있던 '쩌리'였습니다. 그랬던 미국의 영토가 1800년대에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요.

 

  

 

 

1800년대 중반에 이르자, 미국의 영토는 북미 대륙의 대부분을 포함합니다. 마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무적 치트키를 쓰고 미친 듯이 영토를 확장하는 것처럼 불어나죠.

 

  

 

 

미국은 어떻게 이러한 경이적인 영토확장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1800년대 초기, 유럽은 전쟁의 바다였습니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은 천재적인 능력으로 유럽을 차례로 정복하고 있었어요.(그의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을 점령)

 

  

 

 

또한 약 40년 전에 북미 대륙에서 발발했던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당시 에스파냐령이었던 루이지애나를 소유하고 있었죠.

 

  

 

 

나폴레옹 曰

: “오~ �! 다 좋은데 돈이 없네… 전쟁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나폴레옹은 당시 유럽을 점령하면서 전쟁자금이 부족해졌어요.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유럽 대륙’을 통째로 삼키는 것뿐이었죠. 이 사실을 눈치 챈, 미국은 특사단을 보냅니다.

 

  

 

 

미국 특사단曰

: “Hey~ 나폴레옹 형아. 1,000만 달러 드릴테니 뉴올리언스 파실래요? 흐흐”

 

  

 

 

나폴레옹은 5,000km 멀리 떨어진 땅보다는 당장 돈이 시급했습니다. 그러자 이 통 큰 황제는 급기야 더 큰 제안을 하죠.

 

  

 

 

나폴레옹 曰

: “오~ 양키 왔어? 어서 와~ 500만 달러 더 얹어주면 덤으로 ‘루이지애나’도 같이 줄게. 너네 가져”

 

  

 

 

미국 특사단은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아마 속으로 나폴레옹이 “미쳤나?”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당시, 루이지애나는 오늘날 미국 남부에 코딱지만하게 박혀 있는 루이지애나 주가 아니라, 미국의 14개주와 캐나다 2개주를 포함하는 엄청나게 넓은 대륙이었습니다.

 

  

 

 

딜은 성사되었고 미국은 1,500만 달러의 돈으로 루이지애나를 소유하게 되는데, 에이커당(1에이커는 4,047 제곱미터) ‘4센트’인 셈이니 거의 무료나 다름없었어요.

  

  

 

 

이 덕분에, 미국은 로또를 맞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영토가 2배가 되었죠. 이렇게 손쉽게 광활한 영토를 얻게 된 미국인들은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어요.

 

  

 

 

미국인들 曰

: “그래 맞아! 우리가 영국을 이기려면 인구가 많아야 해.. 그리고 인구가 많으려면 일단 땅덩어리가 넓어야 해”

 

  

 

 

이러한 미국인들의 생각은 점점 확고해졌죠. 그 결과, 미국 정부는 동부에 몰려 있는 미국인들을 서부로 이주시키려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후, 미국에는 바야흐로 ‘서부개척시대’가 도래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배우가 출연하는 서부극은 바로 이 시기를 바탕으로 영화로 제작된 것이죠.

(서부개척시대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

 

  

  

 

아무튼, 미국은 별안간 영토가 2배로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가진 땅덩어리에 비해, 인구가 턱없이 부족하여 중서부는 전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죠.

 

  

  

 

그러자 미국 정부는 한가지 얄팍한 꾀를 생각해냅니다. 바로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마케팅을 펼치게 되는데요.

  

  

  

 

미국 정부 曰

:“오우~ 유럽인들아! 지금 우리 땅으로 이주해 오면, 겁나게 싸게 땅도 주고 잘 살게 해줄게. 드루와 어서”

 

  

 

 

이런 아메리칸 드림 떡밥은 유럽에 많은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1800년대 중반까지,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죠.

 

  

 

 

일례로, 아일랜드에서는 총 인구의 4분의 1인 약 ‘200만 명’이 기회의 땅으로 소문난 미국으로 출발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서양을 건너면서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중 60%가 사망했죠.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전 산업에서 호황을 누리게 된 미국은, 점점 ‘영토 부심’을 부리기 시작해요.

 

  

 

 

1812년, 당시 플로리다는 에스파냐의 땅이었습니다. 에스파냐는 플로리다 외에도 ‘텍사스, 캘리포니아, 북미 남서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죠.

 

  

 

 

그러나 에스파냐는 북미 대륙에 있는 자신의 식민지를 지킬 힘이 없었어요. 1810년 이후부터, 멕시코에서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에스파냐는 단돈 500만 달러에 플로리다를 미국으로 넘겼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북미대륙의 서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에서 자본주의와 금융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그대로 따라 했죠. 그 결과, 1800년대 초 미국은 산업혁명이 시작됩니다.

  

  

 

 

이 시기, 적어도 미국은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전 산업 분야에서 거의 수직상승을 거듭했죠. 그리고 독립 당시 270만 명이었던 인구는 1800년대 중반에 이르자 3천만 명을 넘어서게 됩니다.

 

  

 

 

또한, 영국에서 몰래 밀입국한 영국인 기술자는 방직기를 미국에 전파했죠. 이 덕분에, 수많은 방직공장이 생겨 초기 미국 산업혁명을 주도하게 됩니다.

 

  

 

 

방직산업의 발달로, 남부 지방에서는 목화 재배에 열을 올리게 되죠. 그 결과, 미국의 목화산업은 담배를 제치고 미국 총 수출액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미국의 호황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산업 혁명은 큰 ‘화’를 불러오기도 했어요. 당시 미국에는 수많은 공장이 지어졌는데, 공장들은 주로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한 땅이 많은 ‘북부’에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북부는 공업이 발달했습니다. 공업이 발전한 북부는 남부에 더 많은 목화 생산을 주문했고, 이 때문에 남부는 더욱 농업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 결과, 북부는 미국의 산업을 이끄는 공업적인 도시로 변모했고, 남부는 주로 농업에 특화되었죠. 이는 큰 문제였습니다.

 

  

 

 

안 그래도 전부터 큰 갈등을 벌였던 북부와 남부는 이제 경제와 사는 방식 자체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두 나라’로 갈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형적인 테크트리를 탄 미국은 점점 분열 조짐을 보입니다.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해졌죠.

 

  

 

 

한편, 미국이 분열되고 있는 과정에서도 미국 연방 의회는 1830년대에 ‘원주민(인디언) 이주법’을 통과시킵니다.

 

  

 

 

이 법은, 북미 대륙의 동쪽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척박한 서부 대평원으로 이주시키는 법안이었어요. 한 마디로, “우린 개발할 테니 너희들(원주민)은 저리 빠져 있어!”란 뜻이었죠.

 

  

 

 

수많은 원주민들은 이러한 미국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하여, 강력한 거부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합니다.

 

  

 

 

애초에 원주민들이 미국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은 '1'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1838년부터 1839년까지 원주민들은 강제 이주되었는데, 그들이 지나간 길을 ‘눈물의 행로(Trail of tears)’라 부르게 되었죠.

 

  

 

 

원주민들은 풍요롭게 지난 몇 만년간 조상 대대로 살았던 중동부 고향을 떠나 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주까지 이주되었습니다.

 

  

 

 

이 당시, 원주민들의 이주 과정을 지켜봤던 한 미국인 병사는 훗날 이러한 말을 남깁니다..

 

  

 

 

“남북 전쟁을 겪으면서 포탄에 몸이 찢기고 잔인하게 죽었던 사람을 수천 명이나 보았다. 하지만, 원주민 강제 이주는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잔인한 짓이었다..”

 

  

 

 

원주민들은 이주하면서 4명의 1명 꼴로 추위와 굶주림으로 객사했습니다. 이로 인해, 북미 원주민들은 거의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원주민들도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했죠.

 

  

 

 

이런 비극적인 역사에 대하여, 현 미국인들은 실제로 꽤나 반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미국 정부는 ‘원주민 보호 구역’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에게는 세금도 걷지 않으며 지원금을 주고 있죠.

또한, ‘인디언’이라는 명칭을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으로 대체한 것도 이러한 반성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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